현재 사는 우리에게 정확한 적이란 없는 듯하다. 어떨때는 여기가 저럴때는 저기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는 적이다. 특히나 자본이라는 룰에 몰입되어버린 세상에 사는 우리 현 나라는 더더욱 적을 알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모두가 적이 된다는 뜻이기도한 말장난의 시기가 되어 버렸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념이 무관심화 된 후 아니 이념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도덕성 혹은 정의로움이 사회에서 큰 의미가 없어진 후 자본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간의 구별짓기가 오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아쉬운듯하다. 그런가?
더불어 가장 쉬운 이해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인 노노갈등이다. 사용자는 무관하게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구별짓기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이러한 흐름은 상당히 견고하게 기득권의 문제로 가버렸다. 예전에 기득권은 물질적기준 혹은 권력 등등이로 구별이 되었는데 이제는 먼저 기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어지고 있다. 어떤 이념이기보다는 순서에 따른 구별짓기가 된 것이다.
묘해버린 것이다.
이념이나 도덕에 의한 집단적 구별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기초한 구별 혹은 집단적 의사가 중요한 시대에 있다. 그러니까 재개발같은 이슈에 대한 집주인들보다 더 높은 세입자들의 기대랄까..아니면 돈을 잡기 바라는 돌잡이 부모의 심정이랄까...
자본주의 시대의 대중문화는 명쾌한 구석이 하나 있다. 자본이라는 환산가능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위성을 부여받거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떤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있는 돈으로 희귀성을 구현할 수 있다. 돈이 많은 그 사람은 추하건 그렇지 못하건 의미있는 가치를 가진다.
추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이루었다는 것을, 추하지 않다면 모든 것을 가진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식의 모든 가치가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의 강점은 객관적일수 있고..태생과 학연, 지연 그리고 생득적 구별짓기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런이유로 자본주의의 힘은 가질 수 있는 듯하다. 기존의 질서는 지나치게 지배와 피지배를 견고히 했다.
어찌하건 우리는 다소 지엽적이고 세밀한 형태의 구별을 짓고 있다. 나역시 그러하게 될 듯도하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은 "눈이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문구가 있었으면 좋겠고, "하늘을 우러러"살던 시인이 일상의 존속을 지속했으면한다만...모르겠다. 그저그런 사람들이 되어가는 과정이니만큼 할말이 망연하다.
드라마속 대중문화는 돈을 중심으로 판타지가 이어져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것이 가장 중요한 가설의 시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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