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시대' 라는 책을 쓰기로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 오른 것은 알베르 까뮈의 반항인 첫 문장인 '"반항인이란 누구인가?" "농"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라는 구절이었다. 까뮈의 반항인은 자기 존중감 혹은 자기 주권을 인식하는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상적인 삶에서 '농' 그러니까 '아니요'라고 대답한 것은 그가 느끼는 일상의 부조리의 한계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부조리...더 자세히 말한다면 개인 스스로가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오면서 본인 개인스스로를 더 생각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는 부정하지 않고 있다가 외부세력의 더 과한 요구에 더이상의 긍정 혹은 예라는 답 대신 부조리에 대항하는 아니오라는 부정을 표현하며 반항하게 된다.
까뮈의 반항인을 처음 접했을때는 좀 모호한 느낌이 많았다. 개인의 자아를 인지하면서 반항을 하는데 그 전제가 긍정적인 상황을 혹은 과하지 않은 부조리의 수용을 인정하면서 시작된 느낌이었다. 참을 수 있는 부조리까지는 인정하면서 그 한계지점에서 자아가 표출되는 그런 흐름이 반항인에게는 있었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이해다.
다만, 현시점 그러니까 2020년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반항인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개인들의 모습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개발과 경제성장, 그리고 민주화라는 명분아래 좌, 우의 대립 속에서 개인의 존엄 혹은 가치가 외면 당하거나 일부에 한정된 경우가 많았다. 개인보다는 항상 단체의 이념이 더 중시되어 사회는 움직여졌고 그것이 당연시 되었다. 개인의 희생을 너무나 강조해왔던 사회를 한국 사람들은 당연한 이념처럼 살아왔다.
IMF시절 당시 전국민의 금모우기 운동은 언뜻 국민이 국가의 재난을 대처하는 합의된 행동처럼 보이지만, 대기업을 비롯한 국가경제 운영의 잘못을 국민들 모두에게 전가시켰으며, 심지어 가난한 시골 할머니의 하나뿐인 금가락지 마저도 단체 혹은 국가의 대의를 위해 빼았아야 했다.
사실 시골 할머니 아니 일반 국민들이 아이 돌반지며 결혼반지 등 인생의 몇 안되는 추억까지 팔아치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IMF의 극복결과라는 것이 수 많은 비정규노동자로 전락한 일반 국민들이라는 것 외에 금을 헐값에 판 댓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알기가 어렵다.
이러한 사회적 목표와 같은 합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은 자기편이건 아니건 적당한 부조리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 혹은 인내하면서 살아왔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 자신들의 목표 혹은 대의를 위해 항상 국민들 아니 개인들에게 참고 살아 주며, 단체의 가치에 대해 동참해 줄 것을 강요해 온 것이다.
한국인은 군사독재 시절에는 경제성장과 개발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고 탄압을 정당화 시켰으며 관련 부조리에 개인은 인내해야 했다. 민주화 시절에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역시 개인은 감내해야할 부조리가 있었으며 지도층의 정당성과 확장을 위해 개인들은 군사독재시절과 동일하게 참아야 했다.
결국 한국인에게 주어진 것은 항상 참아야 했던 개인이 권리였으며, 자유였다. 그들의 정의를 위해 혹은 내가 지지하는 세력들의 정의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 혹은 사회적 부조리는 갑내해야할 비용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문득 "농" 혹은 "아니요" 를 말할까?
한국 사회의 성숙과 변화는 '인내'의 미덕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했다.
물론 사회의 성숙에 대해서 정확하게 뭐라 표현할 수 는 없지만 최소한 경제성장률과 남북관계로 국민을 조롱하는 집단들의 가치를 가지고 볼때 절대적 빈곤상황이 해소되었다는 개인들의 생각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전쟁의 공포가 머리속에서 어느정도 지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또다시 물론 사회지도세력들은 이 두 가치를 한국사회 구성원들을 조정하는데 더 지속적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경제는 항상 더 성장하거나 부족한 위기상황으로 볼 것이며, 전쟁의 공포는 언제든지 다시 재생산해서 개인들을 다시 일률적인 이념화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경제성장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이용하며 민간정부가 들어선 김영삼정부 이후에도 지속 반복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전쟁공포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장을 말하며 개인들의 인내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참는 것인 미덕인 사회에 있다.
심지어 광장에서 출발한 세력마저도 개인의 가치를 단체의 힘으로 포장하며 개인의 중요성을 외면해 왔다.
지금도..
민주화 세력의 지도급 인사들의 잊따른 성추문 사건과 이에 대한 굴절된 비난은 보수세력의 성추문 사건과 확연한 비난의 차이를 보였다. 공과 과를 구분한다해도 동일한 과오에는 동일한 비난이 따라야 했으나 공과 과를 말하며 비난은 굴절되었다.
....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농"이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저항도 아니고, 사회에 없는 것을 요구하는 강제도 아니며, 사회에 통용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이상도 아니다.
까뮈의 반항인이 추구했던 농
그러니까 인간다운 존엄함을 원하는 것이며
사회의 지도층, 지식층, 자본가들이 인간으로써 보편적으로 누리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개인의 첫번째 언어 표현이다.
* 졸린닥 훈씨..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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