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김종학 감독과 한국드라마산업의 변화

졸린닥 김훈 2013. 7. 31. 11:36

김종학 감독이 죽었다.

그는 한국 드라마를 성장시킨 장본인이라 말할수 있다

여명의눈동자를 통해 드라마 외주제작의  본격적인 시대를 만들었고 모래시계 통해서는 제작사와 방송사간의 상업적 요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태왕사신기는 드라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한류드라마를 창출하며 산업적 시스템을 추구했다.

그의 이런 행보는 비단 연출가라는 역활에서 멈추지 않고 기획자이자 제작자라는 프로듀싱 개념의 첫번째 프로듀서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송사에 종속되어 있는 드라마제작 영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여 지금의 드라마산업 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아쉽게도 그의 외로운 생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이미 이야기 했던 세편의 드라마가 가지는 의미를 한번더 언급 해야한다. 그래야만 그의 죽음을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지 가까워 지기 때문이다.

우선 여명의 눈동자.

이 드라마는 MBC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다. 기존의 미니극이 트랜드함을 만들며, 가볍거나 코믹하거나 흥미위주의 드라마 극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상당한 서사를 바탕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였던 작품이다. 그러니까 기존 미니가 아이디어 싸움의 드라마였다면 이 드라마는 철저한 준비와 다양한 노력이 필요했던 그런 류의 드라마다. 월메이드는 아니지만 그런 류의 드라마스타일을 느끼게한 한국 드라마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를 통해 그는 스타 연출가라는 칭호를 얻으며 외주제작사를 직접운영하며 방송사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외주제작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 삼화와 같은 외주사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스타성을 가지고 독자적 힘을 어느정도 가진 드라마제작사로는 김종학프로덕션이 중요한 위치였다.

모래시계

이 작품은 한마디로 SBS방송국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모래시계는 퇴근시계라 불리우며 적폭적인 인기를 얻었다. 서울방송이라는 국한 된 지역임에도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TV드라마를 비디오가게에서 대여해서 보는 진풍경을 지방에서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그당시 서울방송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히트작이 변변치 못한 라인업에 대표작 하나를 만들어내며 지금의 드라마국을 만드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MBC출신 김종학감독이 SBS에 진출하면서 귀속적 관계였던 방송사 외주사간의 관계에 변화를 만드는 그런 형태를 만들었다. 이는 외주사에게 출신방송사를 넘어 타 방송사까지 진출하는 다양성을 만든 그런 내용이라 하겠다.

그리고 태왕사신기

이작품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여러측면에서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 드라마라 하겠다. 내용하나하나를 보면, 첫번째는 드라마 판권이 방송사가아닌 제작사가 완전소유한 형태의 드라마제작물이었다. 두번째, 그 당시에는 생소한 투자와 제작이 합쳐지면서 문화전문회사라는 형태의 구도로 만들어진 첫번째 드라마였다. 방송사 외에 변변한 투자처가 없던 드라마산업에 그럴싸한 대형 투자가들이 나타난 드라마였다. 셋, 400억원을 초과한 드라마역사상 전무후무한 투자비가 들어간 대형드라마 였다. 총 24부작이었음을 생각하면 회당 20억원 가까이 투입된 엄청난 작품이다. 드라마 회당 평균제작비가 2억5천에서 3억수준을 왔다갔다하는 현실에서 앞으로도 이런 작품은 나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기획 투자 제작 국내판매 해외판매 및 머천다이징까지 총체적으로 프로듀싱된 최초의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이 마지막 요소는 제작에 한정되었던 드라마를 한 차원 높게 산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만, 모든 선구자들이 실행착오에 오는 고통이 크듯 김종학감독에게 이 다섯번째 요인은 그의 미래를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즉, 연출가인 그에게 총괄 프로듀서의 역량을 요구하게 되었고, 거기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랐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다름아닌 돈이었다.

연출자는 드라마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하지만, 프로듀서는 작품과 함께 투자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드라마산업에는 그런 경험치의 인물이 전혀없었던 상태였으며, 지나치게 큰 프로젝트는 실패에서 오는 교훈보다는 고통을 너무나 크게 만들었다.

외형적인 투자비 조달에 성공했던 ‘태왕사신기’는 아쉽게도 투자에 대한 이익제공을 모두에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은 성과였지만 지나치게 큰 투자였기에 이를 충족시킬만한 수익발생은 만드는데 한계가 있었고 어느누구도 이런 대형프로젝트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투자수익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김종학’이 가져가야 한다.

그가 한 최고의 모험과 도전 혹은 최정상의 이정표가 연출가 김종학을 잡은 것이다. 그는 연출가로써는 훌륭했지만 프로듀서로써는 우선 경험이 없었으며, 조력도 또한 없었다.

태왕사신기 이후 그의 생은 곧장 내리막이었다. 부채에 시달리던 김종학프로덕션은  코스닥기업인 덕에 많은 회사의 한류 테마용 먹이로 사용되면서 이리저리 시련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여러회사에 넘겨져야 했고,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이름이 걸린 회사에서 대표직을 물러나야 했다. 실상 김종학감독과 김종학 프로덕션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대감독은 이후 각종 소송과 고소에 시달려야 했던 나날이었다. 그는 최고의 지점에서 추락해야 했고 재기를 위한 몸부림이 필요한 그런 위치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지점이 드라마산업의 큰 아쉬움이라 하겠다. 아니 선구자적인 입장의 사람이 가져야할 숙명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 버린 ‘신의’는 그가 많이 지쳐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런 작품이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했지만 연출가의 길에서 멀어져버린 김종학 감독에게 ‘신의’는 서투른 작업이었다. 연출도 프로듀싱도 모두 엉성한 작품이었고 송사를 마무리하고 싶어던 작품에서 더 많은 송사를 만들어내는 오류를 만들어 버렸다.

물론, 이런 상황을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듀서 역할이란 역시 연출과 다른 입장이라 그가 회복하기에는 먼이야기 였다.

그리고 그는 떠나버렸다.

한국 드라마산업의 발전 전부가 그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인데, 그는 자신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해 떠나버렸다.

성공한 연출자 김종학은 프로듀서 김종학에게 발목이 잡힌것이다. 그의 변화는 한국 드라마산업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그 변화에 만들어진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그의 죽음 이면에는 드라마수익에 대한 방송사와 외주사간의 투쟁이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서로가 경쟁이 아닌 균형적인 계약관계가 요구된다는 내용이다. 누군가가 갑이 된다면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강요될 수 밖에 없다.

아쉽고 아쉬운 그의 죽음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로 마무리 할 뿐이다.


** 졸린닥 김훈..총총